카테고리 없음

독서 일기 / 계속해보겠습니다 - 황정은

펀치킹 2023. 1. 15. 19:43
반응형

묘하게 차분한 공기 속에서

꽤나 엽기적인 이야기들을 정적으로 풀어내서

눈길이 가는 소설이다.

 

나나 나기 소라 애자 순자 모세 등

순한 맛 일본식, 하지만 한국의 레트로한 감성을 몇 퍼센트쯤 묻힌 이름들 때문에

그 묘하게 꿈과 현실 속을 왔다갔다 하는 느낌의 분위기가 형성되는 느낌. 

 

책 속 사건들 중 인상깊은 사건이 있어 발췌해 적어놓고, 기억해보고자 한다.

 

검은 주제에 금붕어, 라는 생각을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심하게 그것을 표적 삼으며 시간을 보내곤 했습니다. 꼬리지느러미를 막대로 건드리면 살랑, 하고 방향을 바꿔 달아납니다. 달아나는 방향으로 쫓아서 다시 건드리면 다시 살랑, 달아납니다. 이렇게 몇번이고 집요하게 쫓고 건드리다가 하루는 구석으로 몰아붙인 뒤 막대 끝으로 꼬리지느러미를 꾹 찍어눌렀습니다. 지느러미를 잡힌 금붕어는 수조 벽에 코를 비비며 벗어나려고 안간힘이었습니다. 그 짧은 몸부름에 막대에 눌렸던 지느러미가 찢어지고 작은 조각이 뜯겨져나왔습니다. 지느러미 조각이 물에 풀린 먹처럼 고요하게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가 떠오르기를 반복했습니다. 정신없이 그것을 지켜보았습니다. 문득 뒤를 보니 나기 오라버니가 서 있었습니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왔는지 먼지 투성이에 머리카락엔 흙이 엉겨붙은 유령 같은 모습이었습니다. 눈언저리엔 희미하게 멍이 올랐고 입술 끝엔 검붉은 점처럼 피가 고인 채로 굳어 있었습니다. 오라버니는 물끄러미 나를 보고 있다가 수조 쪽으로 다가와서 물속을 들여다보았습니다. 검은 금붕어는 입을 뻐끔거리며 물풀 근처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이따금 가슴지느러미를 움직여 방향을 바꿔가며 경계하고 있었습니다. 오라버니는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다가 등을 펴고 나나와 마주 선 뒤, 손바닥을 활짝 펴서 나나의 뺨을 때렸습니다. 한대만으로 그치지 않고 몇번이나 힘껏, 힘껏.

아파?

오라버니는 물었습니다.

나나는 얼떨떨하게 정신이 나간 채로 오라버니를 바라보았습니다.

아프냐고 재차 묻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아프지 않아, 오라버니는 팔을 늘어뜨리고 서서 태연하게 말했습니다.

내가 너를 때렸으니까 너는 아파. 그런데 나는 조금도 아프지 않아. 전혀 아프지 않은 채로 너를 보고 있어. 그럼 이렇게 되는 건가? 내가 아프지 않으니까 너도 아프지 않은 건가?

대답을 가다리는 듯 바라보는데도 대꾸하지 못하고 얼얼한 뺨에 손을 대고 눈을 깜박이며 마주 보았습니다. 오라버니는 새까만 눈으로 나나를 보며 물었습니다.

하지만 너는 아프지, 그렇지?

압도된 채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금붕어를 건드릴 때, 너는 아팠어?

고개를 저었습니다.

같은 거야,라고 오라버니는 말했습니다.

너하고 저것하고, 같은 거야.

아파?

오라버니는 물었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기억해둬,라고 오라버니는 말했습니다.

이걸 잊어버리면 남의 고통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 괴물이 되는 거야. 

728x90
반응형
LIST